
존윅 시리즈의 성공 이후, 라이언스 게이트는 암살자들의 세계를 확장하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지속해 왔습니다. 컨티넨탈 호텔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이어, 이번에는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스핀오프 발레리나가 등장했습니다. 과연 이 작품은 단순한 프랜차이즈 확장의 욕심인가, 아니면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액션 영화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요?
존윅 세계관을 계승한 새로운 액션 스타일
발레리나는 존윅 시리즈와 세계관을 공유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보통 스핀오프 작품들은 원작에 등장했던 인기 캐릭터를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영화는 루스카 로마에서 훈련받은 새로운 암살자 이브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아나 데 아르마스가 연기한 이브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복수를 결심하게 되는 전형적인 서사를 따르지만, 그녀가 구사하는 액션은 존윅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훈련 과정에서 교관이 이브에게 던진 조언에서 비롯됩니다. "여자처럼 싸우라"는 이 말은 신체적 한계를 인정하고 영리하게 상황을 활용하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브는 정면 승부보다는 상대를 속이고 급소를 공략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이는 존윅이 보여준 장인 정신의 액션과 대비되는 지점입니다. 존윅이 한 분야를 파고든 장인이라면, 이브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무기로 활용하는 뷔페 레스토랑과 같습니다. 칼, 도끼, 수류탄, 화염방사기, 심지어 스케이트까지 다양한 도구를 무기로 사용하는 모습은 여성 암살자 캐릭터만의 독특한 전투 스타일을 완성합니다. 이러한 액션 디자인은 발레라는 우아한 예술과 청부살인의 잔혹함을 병치시키며, 폭력을 우아함으로 승화시키는 독특한 미학을 창조해 냅니다.
렌 와이즈먼 감독의 공간 활용과 액션 연출
언더월드로 데뷔해 다이하드 4.0으로 절정을 달렸던 렌 와이즈먼 감독은 토탈 리콜 이후 한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영화로 복귀한 그는 발레리나에서 자신의 장기인 액션 연출에 혼신의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특히 공간의 구조와 특성을 기가 막히게 활용하는 능력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좁은 석조 건물에서 총기 대신 수류탄으로 다수를 상대하는 장면은 공간의 물리적 특성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영리한 액션 설계입니다.
약 30분이 지난 시점부터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그야말로 압도적입니다. 카메라 워킹과 편집은 무용수의 리듬에 맞춰 긴박하면서도 리드미컬하게 전개되어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합니다. 특히 화염방사기와 소방호스를 활용한 대결 장면은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는 소재를 실제 전투 무기처럼 연출해 낸 감독의 역량을 보여줍니다. 렌 와이즈먼은 언더월드에서 보여줬던 미술과 액션에 대한 일가견을 다시 한번 증명하며, 한국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액션 퀄리티를 선보입니다. 이는 단순히 자본의 차이를 넘어서는 연출력과 기술력의 차이입니다. 긴 화염방사기 씬이나 여러 무기를 연속적으로 활용하는 전투 장면들은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합니다.
여성 암살자 캐릭터의 심리적 깊이와 서사의 한계
아나 데 아르마스는 노타임 투 다이에서 보여준 활약을 넘어 발레리나에서 본격적인 액션 배우로서의 면모를 과시합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완벽한 암살자로 길러진 이브의 정체성 혼란은 단순한 복수극에 심리적 깊이를 더합니다. 차가운 복수의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적 유약함과 예술에 대한 갈망은 관객이 캐릭터에 정서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이는 단순히 죽이고 부수는 액션을 넘어 심리 스릴러적 요소를 가미한 시도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서사적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브의 어린 시절부터 보여주는 지나치게 구식이고 선형적인 구조는 아나 데 아르마스가 등장하기까지 무려 15분 이상을 소비하게 만듭니다. 이 진부한 서사를 감내해야 본격적인 액션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약점입니다. 더욱이 이브의 복수 타겟이 되는 조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가브리엘이 연기한 총장이 왜 집착하는지, 이브의 아버지가 왜 조직을 떠나려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 없이 서사가 전개됩니다. 이런 설정들을 제대로 풀어냈다면 더욱 탄탄한 구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분 이후부터는 감탄의 연속입니다. 최수영과 정두홍의 등장은 국내 마케팅용에 가까웠지만, 이는 전체적인 완성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존윅 시리즈의 반가운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컨티넨탈 호텔과 같은 익숙한 배경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기존 팬들에게는 만족감을, 새로운 관객에게는 신선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발레리나는 압도적인 시각 미학과 긴장감 넘치는 액션으로 할리우드 액션 프랜차이즈의 성공적인 확장 사례를 만들어냈습니다. 서사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액션만으로도 극장에서 볼 가치가 충분한 작품입니다. 존윅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이 영화는 액션 영화 팬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